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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은 신하들 꼴보기 싫어서 온돌을 뺐을까? - 실록과 대조 by 천하귀남

조선왕들의 일화(태종~인조편)

숙종이 신하들이 온돌방에서 뒹구는 꼴이 보기 싫어 온돌을 빼버렸다는 야사가 있습니다.
저역시 이 이야기를 창덕궁안내하시는 분에게 들었는데 그때는 홍문관인지 하는 임금께 간언하는 기관의 온돌이라 들었습니다.
아마 신하들의 당쟁관련 간언이 귀챦으니 빼버린 걸거다 이해했습니다.

헌데... 요즘 기록확인체계가 매우 좋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의 숙종대 온돌을 뒤져보니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옵니다.

숙종 11권 7년 5월 3일 (을묘) 2번째기사 / 재이에 따른 방책을 논의하다
숙종 12권 7년 9월 5일 (갑인) 1번째기사 / 동지경연사 이단하가 재변시 경비 절감의 필요성을 아뢰다
숙종 14권 9년 1월 21일 (계해) 2번째기사 / 좌의정 민정중·영중추 송시열이 청대하여 입시하다
숙종 35권 27년 9월 29일 (계축) 3번째기사 / 인정문에 나아가 궁녀 설향·숙영 등을 친국하다
숙종 35권 27년 10월 1일 (갑인) 2번째기사 / 인정문에 나아가 친히 국문하다. 영의정 최석정을 진천현에 부처시키다
숙종 35권 27년 10월 2일 (을묘) 5번째기사 / 왕명을 받들어 좌의정 이세백 등이 정국을 내병조에 설치하고, 숙정 등을 국문하다
숙종 39권 30년 6월 18일 (병술) 1번째기사 / 지평 조태억이 개첨한 계를 내어 유명천·김덕기·한영휘 등의 처벌을 주청하다

이중 숙종35년은 장희빈관련 사건이라 온돌과는 직접 관련이 없고 위의 3건이 온돌관련 기사입니다. 여기서 3번째
숙종 14권 9년 1월 21일 (계해) 2번째기사 / 좌의정 민정중·영중추 송시열이 청대하여 입시하다
가 야사와 관계됩니다.

좌의정(左議政) 민정중(閔鼎重)과 영중추(領中樞) 송시열(宋時烈)과 행 지중추(行知中樞) 이상진(李尙眞)이 청대(請對)하여 입시(入侍)하였다. 송시열(宋時烈)이 내수사(內需司)를 혁파(革罷)할 것을 청하여 말하기를,
 
“사사로운 것은 내수사(內需司)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성상께서 헤아리시어 혁파(革罷)하고, 그것으로써 진휼(賑恤)하는 물자에 도와야 합니다. 그러한 뒤에야 여러 신하들에게 사사로움이 없도록 요구할 수가 있습니다.”
 
하고, 민정중(閔鼎重)도 이를 말하였다. 이상진(李尙眞)은 말하기를,
 
“성상께서 송시열(宋時烈)을 머물러 있게 하고자 하면서도 그의 말을 적용하지 않으시니, 이것이 어찌 어진이를 머물러 있게 하는 도리이겠습니까?”
 
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어렵게 여겼다. 이 뒤에 임금은 두 자성(慈聖)의 하교(下敎)로써 양전(兩殿)에 소속되어 있는 수진궁(壽進宮)과 명례궁(明禮宮) 두 궁(宮)에 저장되었던 것과 중궁(中宮)에 소속되어 있는 용동궁(龍洞宮)의 재용(財用)을 모두 덜어내어 진휼(賑恤)하는 자원에 보태게 하였다. 이상진(李尙眞)이 또 시목(柴木)을 공진(供進)는 폐단을 아뢰었다. 송시열(宋時烈)이 인조(仁祖) 때의 윤황(尹煌)의 말을 인용(引用)하여 대궐 안의 궁인(宮人)들이 판방(板房)에 살던 옛제도를 회복하도록 청하였다.【구례(舊例)에 궁인은 판방(板房)에 살고 온돌(溫突)에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민정중(閔鼎重)도 같은 〈뜻을〉 아뢰었으나, 임금은 끝내 지난(持難)하여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민정중은 송시열(宋時烈)이 근성(近省)에 직숙(直宿)할 것과 이상(李翔)이 경연(經筵)에 들어와 참여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그 뒤에 또한 경연의 신하들의 말로 인하여 이상으로 하여금 금중(禁中)에 직숙(直宿)하게 하였다.
 
결론은 그런일은 없었다네요. 온돌을 빼자고 한건 송시열이고 숙종은 지난(지극히 어렵다. 현실적으로 힘들다는 뜻?)하다고 반대했습니다. 우리나라의 겨울 특히 과거에는 엄청 추웠습니다. 온돌이 없다면 과연 관리들이 일을 제대로 할수 있었을까요? 송시열 할배도 온돌에서 지질 연세셨을텐데 무슨 속셈으로 빼자고 하신걸까요? 화로를 사용할경우 숯을 쓰기 때문에 비용이 더 들어갈수도 있습니다.


그나저나 야사도 이제는 쉽게 운운할수 없는 세상이 되가는군요. 어찌보면 잘된일이기도 합니다. 한종류의 이야기가 주인공이름만 바꿔서 여기 저기서 튀어나와 신뢰도를 깍아먹었는데 그런점은 확실히 바로잡을수 있을듯 합니다.





덧글

  • 耿君 2009/05/05 15:33 # 답글

    오오 그렇군요 (끄덕)
  • 천하귀남 2009/05/05 16:06 #

    생각외로 간단하게 찾을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저런 유용한 사이트가 늘어주면 좋겠습니다.
  • 들꽃향기 2009/05/05 18:27 # 답글

    화로식 난방보다 온돌식 난방이 더 많은 연료를 사용하고, 이는 당시인들도 인지하는 바였습니다. 예를 들어 한 집이 온돌방으로 겨울을 날 경우에는 가히 수백평의 삼림을 태워야 한다는 얘기도 있었으니깐요.

    이래서 조선 후기에 온돌방이 확산되면서, 삼림(산)의 소유권이 중요한 논쟁거리가 되고, 그것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산송이 조선 후기 소송 내내 주요한 소송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더욱이 이러한 온돌방이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이를 감축해야 한다는 논의는 선조 시기부터 꾸준히 있어왔습니다.
    더군다나 서인의 정치적 슬로건은 제도의 개혁보다는 '절용론'에 있었으므로, 서인집권 시기에 저러한 절용론이 끓임없이 강조되어 왔던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에 대한 논의는 역사비평사에서 나온 '조선시대 생활사 3권'에 김경숙 선생님이 잘 정리하셨더군요.
  • 松下吹笙 2009/05/05 19:03 #

    화로나 일본식 난방법인 이로이 경우는 효율성이 적지요. 온돌이야 이들 보다 연료를 더 소모 할 수는 있어도 효율성이 더 뛰어나지요. 그렇기 때문에 온돌의 보급은 갈 수록 확산될 수 밖에 없는 것이구욤. 후대에 겹구들까지 나와서 보다 열효율성을 보완해서 난방비를 아끼려는 노력도 보이더라구염
  • 천하귀남 2009/05/05 19:19 #

    좀 이해가 잘안되는군요. 숯이 비용이 덜든다? 나중에 한번 확인해 봐야겠지만 숯자체는 공정이 복잡하기도 하고 아무나무나 쓸수 있는것이 아닙니다. 산 하나를 없애서 1톤의 숯을 얻는다고 까지 하는데 운반비 까지 고려하면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해당책을 언제 한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 들꽃향기 2009/05/05 19:49 # 답글

    이는 화로식 난방이 화로 하나로 방 하나 전체를 데우는 식이 아니라, 바로 그 근처에 앉아 있는 사람만 데우는 방식(부분난방)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방 전체의 냉기로 봤을 때는 윗분께서 지적하신 것처럼 다 해결이 되지 못하기에, 일본에서는 이불식 의복(몇겹씩 겹쳐있는)이 발전하기도 했지요.

    반면에 온돌 방식(특히 쪽구들이 아니라 고려시대 이후로 등장한 전면온돌 방식)은 방 전체를 데우는 것이기 때문에, 들이는 연료량이 압도적일수밖에 없고, 반면에 확실한 난방을 보장할 수가 있지요.

    당연히 화로 하나로 집 하나를 다 데울수는 없고, 또 그럴려면 수많은 숯이 들어가 당연히 난방비가 온돌방보다 많이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즉 화로식 난방과 판방은 기존의 부분난방 방식을 의미하는 것이고, 온돌방은 전면난방 방식을 의미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 들꽃향기 2009/05/05 19:50 # 답글

    그런데 문제의 발단은 천하귀남님께서는 화로방식이 방 하나를 다 데우는 것으로 파악하였던 반면에, 저는 종래의 화로방식과 새로운(당시로서는) 온돌 방식의 절대적인 연료 소모량 자체를 그냥 비교한 것에서 오해가 생기지 않았나 싶습니다. 당연히 화로 하나로 방 하나를 다 데우려면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갈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우리는 지금 방 하나 전체를 난방한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만, 옛날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고구려-발해의 온돌을 연구한 송기호 선생님만 해도 당시의 온돌은 '쪽구들'이라고 하여 앉아있거나 누워있는 자리만 데우는 부분난방 방식이었다고 하지요. 이러한 온돌이 '전면난방'방식으로 발전하는 것은 고려시대 산사유적에서 최초로 나타납니다.

    때문에 조선 후기에 와서 온돌방이 화로보다도 더 많은 연료를 소모한다는 이야기는 '부분난방'방식에서 '전면난방'방식으로의 발전을 의미하며, 송시열 등은 온돌방을 판방으로 교체하라고 한 것은, 왕이 '전면난방' 방식의 편리함을 포기하고 '부분난방'의 고통을 감수하고서라도 절용을 해야한다는 논지가 아니었을까 싶군요.
  • 들꽃향기 2009/05/05 19:58 # 답글

    실제로 조선 왕조 초기에는 온돌방은 비용이 많이 든다고 하여, 군기를 보관하는 창고(활이나 화약이 습기를 머금지 않게 하기 위해서), 왕실의 노인이나 웃어른이 거주하는 방 등에 제한적으로 설치되었습니다.
    다만 화로식 난방 자체(부분난방)는 방 자체를 따뜻하게 할 수 없기에, 임금의 침전 같은 경우, 침상의 바로 아래에 벽돌을 깔고 그 아래에 화로를 까는 방식이 쓰이기도 했는데, 명종시기에는 이 화로의 불이 지나쳐 침전에 불이 난 사례도 있습니다.

    이러던 것이 조선 후기에 전면난방 방식으로서의 온돌방이 확산되는데, 그 확산에 대해서 지식인들 간에도 많은 논쟁이 있었습니다. 위의 논쟁은 바로 그러한 논쟁의 일단을 의미하죠.
  • 천하귀남 2009/05/05 20:04 #

    아무리 개인난방이라고 하더라도 숯이 연료비가 덜들어간다는건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렇게 숯이 연료비가 적다면 과연 민간분야에서 온돌이 대부분이 된건 이해하기 힘든일이군요.

    더 하실 말씀이 있다면 트랙백으로 설명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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